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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250607)

shaojin 2025. 6. 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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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제한관람을 했다. 제한 관람이라 종묘해설사와 함께 둘러보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 관란을 하는 이유는 종묘가 사당이기 때문이다. 


종묘란?

한자로 종묘(宗廟). ‘종(宗)’은 으뜸 종, ‘묘(廟)’는 ‘사당’을 뜻한다. 즉, 종묘는 가장 으뜸가는 사당, 조선 왕과 왕비의 나무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공간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신주는 조상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진다. 

 

종묘는 1395년 태조 이성계 때 처음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고 1608년 광해군 때 다시 지어졌다. 남아 있는 건물들은 약 400년 된 고건축들이다. 놀라운 건, 종묘제례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제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1995년,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의 돌길과 신로(神路)

종묘에 들어서면 돌길이 죽 뻗어 있는데 자세히 살피면 가운데가 살짝 높다. 가운데 살짝 높은 길은 신로(神路)라 부른다. 돌아가신 신주께서 밟고 오시는 영적인 길을 의미한다. 신로는 절대 밟지 않는다. 신로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이며, 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이다.  이 길의 규칙 하나하나가 조선의 예법과 사상을 보여준다. 


종묘의 구조

종묘는 약 5만 6,500평이다. 축구장이 26개 정도 들어가는 넓이이다. 

종묘에서 (정전)**과 (영녕전)**이 가장 핵심 건물이다. 이곳이 바로 신주가 모셔지고 제례가 실제로 치러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작은 건물들은 제례 준비를 위한 곳이다. 


종묘의 건물

종묘입구에서 얼마되지 않는 곳에 연못을 가로질러 보이는 첫 번째 건물은 업무를 하던 곳이다. 바로 뒤쪽은 종묘관리소가 있다. 이곳은 특별 개방하고 있어 들어가 보았다. 건물내부 창으로 바라보는 연못은 한폭의 그림이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이 향대청 건물이다. 향대청에서는 제례를 준비하며 향을 보관하고, 제례참여자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다. 향(香)의 기운이 건물 이름에도 담겼다. 또한 이곳은 신주를 전시해 두었고, (진품은 아니겠지?? 확실해 모르겠다) 종묘에 대한 설명을 전시 해놓아 종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장소이다.

 

조금 이동하여,

세 번째 장소는 – 재봉(齋房)이다. 

임금과 세자가 목욕재계하며 마음을 깨끗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이곳만이 유일하게 신도가 아니다. 즉, 돌길의 가운데 길을 밟아도 된다. 이곳은 여기는 산 사람, 즉 임금님이 중심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 어재실: 임금님의 준비실
  • 세자대기실: 세자의 준비실
  • 목욕탕: 실제로 목욕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임금과 세자는 이곳에서 제례를 준비하고, 제례 시간에 맞춰 이동하였다. 제례는 보통 축시일각에 거행되었다. 축시는 새벽 1시에서 3시를 의미하고, 일각은 약 15분 정도이므로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치러진 것이다. 이 곳에 모셔진 왕과 왕비의 돌아가신 날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돌아가신 날에 제례를 지내지 않는다. 그날은 각각 능 앞에서 능제(陵祭), 즉 기제사를 올린다.  따라서 종묘에서 거행되는 제례는 **‘시제(時祭)’**의 개념에 가깝다. 좋은 날을 택하여 조선 왕조의 모든 임금과 왕비께 제례를 올렸던 것이다.

 


 

종묘제례는 임금과 왕비가 직접 오셨으며, 제례 날에는 임금, 세자, 대신들이 모두 참여하여 제례를 치렀다. 현재에도 제례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현재 이 제례는 누가 집전하는가?  전주 이씨 왕가의 후손들이 직접 참여하여 제례를 올리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재현 행사가 아닌, 진짜 제례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종묘대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유교식 왕실 사상을 거의 완벽하게 간직한 채 후손들에 의해 직접 계승되는 제례는 전 세계에서 오직 이곳 종묘에서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 지금도 제례는 계속해서 치러지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거행되는가?

조선시대에는 제례가 여러 차례 거행되었지만, 현재는 연 2회로 5월 첫째 주 일요일, 그리고 12월 첫째 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진행된다. 해당 날짜에 방문하면 직접 제례 장면을 볼 수 있다. 올해의 첫 제례는 5월 4일에 거행되었으며, 약 4만 3천 명이 방문하였다. 기존에는 3만 명 정도가 참석하는 행사였으나, 올해는 훨씬 많은 인원이 다녀갔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의미 깊은 행사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행사는 보통 오전 한 차례, 오후 한 차례 거행되며, 전주 이씨 왕실 측에서 한 달 전에 문화재청에 일정을 고지한다. 따라서 세부 일정은 행사 한 달 전에야 확인 가능하다.


정전(正殿) 

정전 건물은 측면과 정면에서 보았을때 느낌이 매우 다르다. 정면은 측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크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유는 정전의 좌우 길이가 무려 101m 이상으로, 정말 긴 건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길지는 않았다. 처음 지을 땐 왼쪽 7칸만 지어졌고, 이후 임금님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공간이 부족해져 여러 차례 증축하게 되었다. 

 

지붕을 보면 중앙 19칸의 지붕이 높게 솟아 있다. 이곳이 바로 '신실(神室)', 즉 신주(神主)를 모시는 중심 공간입니다.
양옆의 낮은 지붕은 '협실(夾室)'이라 부르며, 제사용 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주는 과연...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셔졌던 나무로 된 신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임진왜란 때 정전은 불탔지만, 신주는 미리 피신시켜 무사했다. 지금 종묘에 모셔진 신주는 모두 조선 초·중·후기의 진품이다. 

 


1. 신주란 무엇인가요?

  • 신주는 조선 왕과 왕비의 혼(魂)을 모시는 나무 기둥
  • 밤나무로 만들어진 정사각형 기둥(높이 30cm, 폭 약 14~16cm)
  • 앞면에는 이름, 시효, 묘호, 존호가 적혀 있음
  • 총 **6개 (上下左右前後) 의 구멍(휴, 洞)**이 뚫려 있어, 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음

2.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 죽으면 혼백은 흩어지기에, 혼이 잠시 머무를 곳, 즉 신주가 필요했다. 
  • 그래서 지금도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며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이다.

3. 신주의 역사적인 변화

  • 옛날엔 어린 손주를 제사상에 앉히기도 했고,
  • 점차 목상(나무 인형), 초상화, 그리고 오늘날의 네모난 기둥형 신주로 발전했다.
  • 불교 이미지(불상, 불화)와 유교의 형식미가 충돌하면서,
    유교에서는 형상을 없애고 추상적인 신주로 정리하게 되었다.

4. 신주의 방향과 배치

  • 임금님은 정좌 시 남쪽을 바라보셨고, 신주는 그 방향대로 모셔져요.
  • 신실에 세 분이 계시다면, 서쪽부터 임금 – 첫째 왕비 – 둘째 왕비 순서로 모셔집니다.
  • 중국 후한시대부터 혼백에게는 산자의 서쪽이 높은 서상제도가 있었다. 

5. 왜 19분만 모셔졌을까?

  • 조선에는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연산군, 광해군은 폐위되어 종묘에 모시지 못했어요.(임금이 아니므로 종자를 못씀)
  • 남은 25분 중 19분만 정전에 모셔졌고, 나머지는 별도의 영녕전에 모셔져 있어요.(오묘제 때문)

6. 오묘제(五廟制)란?

  • 조선은 5분의 조상만을 제사하는 제도를 따랐어요.
  • 현 임금의 4대조까지 + 개국 군주 태조를 포함해 최대 다섯 분만 모시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 시간이 지나 업적이 크신 임금님은 예외로 정전에 영구 보존되었어요.

7. ‘업적’의 기준

  • 사실 업적은 주관적이고, 대부분은 후손 임금의 정치력에 따라 결정됨.
  • 후사가 없는 왕, 단명한 왕, 사후 추존된 왕 등은 정치적 영향력이 약하여 대부분 정전에서 제외됨.
  • 예: 정종, 문종, 단종, 경종, 인종, 예종, 명종, 사도세자 등.

영영전 

정전과 영영전은 지붕이 다르답니다.

정전은 신실이 19개나 되지만, 영영전은 원래 가운데 4칸만 신실이었어요. 나중에 공간이 부족해져서 양쪽에 있는 협실을 조금씩 늘렸다. 가운데를 늘리면  나라의 중심 사당이 두 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협실만 넓힌다. 

 

가운데 네 칸에 거긴 태조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셔져 있다. 원래 정전에 계셨다가 여기로 오신 거죠. 그리고 그 옆, 다섯 번째 칸엔 조선의 두 번째 임금인 정종이 계십니다.

 

종묘는 일제강점기에도 큰 훼손이 없었던 아주 소중한 공간이에요. 왜냐하면 이건 사당, 즉 조상을 모시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손대기 어려웠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고스란히 이 건물들을 보고 있는 거예요.


 

더 중요한 건 여기 계신 모든 분들 현재 한 번도 빠짐없이 남북한의 본인들만의 능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 500년 길고 험난한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 이렇게 잘 지켜냈을까? 유교 때문이다. 조선 개국시에 유교를 받아들여 도덕규범 삼았다. 유교의 가장 큰 덕목은 효와 충입니다. 효란 어르신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사당을 만들거나 제례로서 마치 살아계셨을 때와 똑같이 예를 다하는 것 이게 바로 효이다. 

 

조선시대 임금님들께서는 효라는 기본 덕목을 당시대 백성들에게 제례를 통해 직접 보여준다. 왕은 스스로가 제례를 치르면서 효를 강조해 왕권을 세웠다. 이를 통해 우리 한국인들의 DNA속에 뿌리 깊게 유교사상과 효사상을 심어놓은 것이다. 

 

사극에서 왕에게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옵소서"  " 종사를 보존하옵소서" 라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종묘에서 경복궁방향으로 10분 즘 걸어가면 사직단이 있다. 사직단은 국토의 신 곡식의 신께 제례를 치르는 사당이다. 임금님의 첫 번째 의문은 일단 백성을 먹여야 하죠. 국토와 곡식의 신이 그만큼 중요했던 겁니다.

 

예법에 따라서 임금님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경복궁에서 남면하시기 때문에 앞쪽에 남산 보고 계신다. 이때 좌묘우사의 형태를 띠어 하므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두어서 국가의 두 개의 큰 기틀로 삼았다. 종묘와 사직은 장소를 지칭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